현재위치 > 홈 | 부석사 자료 > 의상대사와 선묘

 

 

 

 


무량수전 서편에 세 개의 바위가 포개어 있다. 이 바위가 부석사란 절의 이름을 낳은 이름 있는 바위다.
또한 이 바위가 부석사 기지를 마련하는데 한 힘이 되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세우기 전에 이곳에 이미 차지하고 있는 이교도가 있었
는데 의상조사의 절 세우는 것을 반대하고 항거하면서 물러나지 않았다고 하며 이교도를 축출하기 위하여 이 절의 수호신이 된 선묘의힘으로 뇌성 벽력과 소나기를 내리게 한 다음 이 바위를 공중에 세번 떠서 들게 하는 것을 본 이교도들은 크게 겁을 먹고 도주케하고 바위는 본 위치로 돌아오고 선묘는 석룡으로 화하여 무량수전 지하에서 아미타 부처님을 받드고 있다고 하여 선묘 처녀를 부석사 수호신으로 무량수전 동북편의 선묘각에 모시고 있다.

<참고문헌>
○김익호, 부석사의 사적고찰, 경북대학교 논문집 제1집.
○이기영 역, 한국의 불교사상.
○일연, 삼국유사.
○한국 불교연구원, 한국의 사찰, 부석사, 일지사, 1976.

 

 

 

 

 

 

 


신라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 법사가 화엄사상을 이 땅에 꽃피우는 데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선묘이다. 선묘 설화는 찬녕에 의해 『송고승전』에 등재된 후 설화의 차원을 뛰어넘어 선묘신앙으로까지 발전했다. 그 뒤 가마꾸라시대에 활약한 명혜 상인에 의해 『화엄조사회전』에서 재현되었다. 선묘 설화는 1953년 민영규 선생이 「의상과 선묘」라는 주제로 『사상계』에 발표한 이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아 왔다. 그 뒤 1981년 김운학 스님이 「일본에 미친 의상의 선묘 설화」 등을 발표하면서 관심을 집중시켰다.

‘부석사(浮石寺)'의 연유는 무량수전 좌측편에 남아 있는 ‘부석(浮石)'이라는 돌에서 시작된다. 이와 관련해 이중환의 『택리지』(1723)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불전 뒤에 큰 바위가 가로질러 서 있고, 그 위에 또 하나의 큰 돌이 내려덮혀 있다. 언뜻 보면 위아래가 새로 이어 붙은 것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두 돌 사이가 서로 연해 눌리지 않았고 약간의 틈이 있다. 노끈을 넣어 보면 거침없이 드나들어 비로소 그것이 뜬돌인 줄 알 수 있다. 절은 이로 인해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 온다.

민영규 선생은 1952년 10월 부석사를 방문, 그때 노주지에게 들은 부석사 석룡에 관한 전설을 “법당 및 땅 속에는 석물이 묻혀 있는데, 무량수전의 아미타불 대좌 밑에서 그 두부가 시작되어 5자형으로 동체는 꿈틀거리며 법당 앞뜰의 석등과 정대석 밑의 미부가 끝나기까지 십수간 길이의 용형을 조각한 석물이 땅 속 깊이 묻혀 있었다고 한다” 고 증언했다. 당시 일제강점기 때 무량수전의 바닥을 개조하자 거대한 석물의 일부가 땅 속 깊이 드러나 보였는데, 용의 비닐인 듯한 조각의 세부를 역력히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무량수전의 개조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잘라 놓았다는 석룡의 허리부분이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부석사측에서 이를 보수할 것을 종용했으나 일본인 기술자가 완강히 거부해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최근 필자가 부석사를 탐방하여 무량수전을 관리하는 노보살에게 여쭈었더니 “십수년 전에 무량수전 석룡의 끊긴 허리부분을 이으려고 했으나 도저히 이을 수 없었다”고 했다. 무량수전의 석룡 외에도 무량수전 마루바닥에 깔아 놓은 법계도기 또한 일본인에 의해 파괴되었다. 지금은 당시의 형체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법당 앞에 법계도기를 백묵으로 그려 놓았을 뿐이다.

기록에 의하면 의상 법사를 사모한 선묘가 용으로 화해서 의상 법사를 보호했다고 전한다. 그 용이 현재 ‘부석'이라는 선돌 아래부분이라면, 꼬리부분은 무량수전 앞마당 석등까지 이어져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무량수불 좌대 밑에 용정샘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과 깨달음과의 관계를 옛 선승들이 누누이 밝힌 바 있다. 『삼국유사』의 남백월산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미륵보살이 된 것도 물과의 인연에서 출발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석사의 용정샘 또한 깨달음을 상징하는 물이라고 볼 수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무량수경』에 나오는 불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무량수전 안에는 아미타여래불만이 모셔져 있다. 고려 문종 8년(1054)에 세워진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에는 이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부석사의 본당인 무량수전에는 오직 아미타불만 봉안하고 좌우보처도 없으며 또한 불전에 영탑도 없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의상 법사는 “법사이신 지엄 스님이 말씀하길 ‘일승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아니하고 시방정토로써 체를 삼아 생멸상이 없기 때문이다'하셨다. 『화엄경』 「입법계품」에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로부터 관정과 수기를 받은 자는 모든 법계에 충만하여 처소와 빈자리를 보충한다'고 하였다. 불타는 열반하지 않고 비는 때도 없다. 그런 까닭에 보처보살을 조성하지 않으며 탑도 세우지 않으니 이것이 일승의 깊은 뜻이다”하였다.

비문 말미에 그 화엄종지는 의상에서 원효 성사까지 전승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무량수전의 무량수여래불은 불생불멸의 진여세계를 보였다고 한다. 무량수전 내부에 봉안된 아미타불좌상은 국보 45호로 지정되었는데 10세기경에 조성되었다. 공민왕(재위·1351~1374) 때 부석사 무량수전이 화재를 만나 불상의 얼굴이 밖으로 날아가 부석 위에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무량수경』에는 “저 보살이 목욕을 하려고 칠보의 못에 들어가 물이 발까지 차기를 원하면 물이 발에 차고, 무릎까지 차기를 원하면 곧 무릎까지 이르고 목까지 차기를 원하면 물이 목에 찬다”고 하여 마음이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적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바로 극락정토의 세계, 만다라의 세계를 발원한 의상의 비원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진리의 세계는 천년 전이나 그 후나 조금도 변함이 없음을 오늘도 보여주고 있다.

의상은 부석사 창건 이후 이 세계를 정토세계에 비유했다. 부석사 무량수전에 도착하려면 꼭 안양문을 거쳐야 한다. 안양문 이전까지는 중생이지만 안양문에 들어오면 그곳은 바로 극락만다라의 세계인 불국정토인 것이다.

의상은 이미 낙산사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이를 깨달음으로 이끌어냈다. 낙산사 홍련암 밑에는 물결이 밤낮으로 고동치고 있다. 그 물결 위에 관음진신을 모셔 두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 아래 선묘정이 있다. 관음의 현장 홍련암과 정토신앙의 현장인 부석사 무량수전 밑 용정샘 위에 아미타불을 모신 연유를 살펴보면 의상의 혜안을 짐작할 수 있다. 의상의 깨달음의 핵심은 바로 파도 소리와 물과 직결됨을 알 수 있다.

화엄 제1의 도량에 화엄선차의 향기가 새롭게 피어난 것은 지난 4월 22일. 한국차문화협회 이귀례 회장에 의해 1천3백 년만에 처음으로 부석사 무량수전의 대좌 밑에서 나는 용정샘물로 아미타여래불에 헌다의식을 올림으로써 화엄선차의 향기가 새롭게 꽃피게 되었다. 용정샘물로 차를 달인 그 맛은 고려 때 문인 박효수가 용정물로 차맛을 맛본 것과 같이 뛰어났다.

부처님께 헌다의식을 올린 뒤, 답사단은 무량수전에서 차맛을 맛보았다. 무량수전을 지키는 노보살은 “이 차맛은 서방극락정토에서나 맛보는 차맛”이라고 감탄을 하였다.

 

 

 

 

 

 

 


의상을 사모하는 선묘는 죽어서 무량수전의 법당 밑 용정샘의 용이 되어 의상을 지키고 있다. 관음의 화신으로 끈질기게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지켜온 선묘는 일본과 한국 땅에서 선연히 빛나는 자취로 남았다. 일본 고산사 아래 선묘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되고, 선묘상만이 교토박물관에 보존되어 왔다. 부석사에는 근년에 선묘각을 세워 선묘의 정신세계를 오늘에 이었다. 이번에 새로 밝혀낸 부석사의 차맥은 바로 부석사 출신의 구산선문의 개창 조사들에 의해 선과 차문화를 이끌어냈으며, 이는 선묘와 선묘샘 또는 용정샘으로 인해 그 맥이 오늘까지 이어져 왔다.

답사팀 일행은 서울에서 아침 7시에 출발, 부석사에 1시에 도착하여 불전에 삼배를 올리고 무량수전 뒷편에 있는 선묘각으로 향하였다. 용정샘물로 곡우절에 딴 차를 달여 선묘각에 모셔진 선묘영정에 차문화협회 이귀례 회장이 차를 올리고, 그 뒤를 따라 송종남·이건호 부회장과 필자가 차공양을 올렸다.

법당 지하에 매몰된 선묘정으로 인해 선묘가 다시 환생하는 듯했다. 아직도 법당 지하 선묘정 밑에는 선묘가 석룡으로 화해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부석사의 노보살 말에 따르면 “과거 선묘정과 식사용정이 있었는데 현재는 매몰되고, 아미타부처님의 좌상 밑에 선묘정이 묻혀 있다”며 “좌상 밑의 샘물은 부석사의 식수로 현재도 활용된다”고 했다. 이를 확인코저 법당 밑에 묻힌 파이프를 따라 선묘각 좌측을 한참 오르니 물탱크가 있었다. 물탱크를 열어 보니 물이 차고 맑고 깨끗했다. 이 물로 아미타부처님과 선묘여인에게 우리 답사팀 일행이 차를 헌다하니 그 차는 곧 감로수로 변하여 깨달음의 차가 되었다.

부석사가 선불교의 현장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부석사 주지인 근일 선사의 큰 원력에 의해서이다. 근일 선사는 잃어버린 부석사 주변의 토지를 새로 찾고 부석사의 선풍을 재현시킬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부석선차가 새롭게 꽃피는 것도 근일
선사가 일으키려는 선풍과 무관하지 않다.
용정샘물로 맛본 차맛은 분명 선묘차향의 세계였으며 한 잔의 차가 곧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의상을 사모하는 선묘는 죽어서 무량수전의 법당 밑 용정샘의 용이 되어 의상을 지키고 있다. 관음의 화신으로 끈질기게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지켜온 선묘는 일본과 한국 땅에서 선연히 빛나는 자취로 남았다. 일본 고산사 아래 선묘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되고, 선묘상만이 교토박물관에 보존되어 왔다. 부석사에는 근년에 선묘각을 세워 선묘의 정신세계를 오늘에 이었다. 이번에 새로 밝혀낸 부석사의 차맥은 바로 부석사 출신의 구산선문의 개창 조사들에 의해 선과 차문화를 이끌어냈으며, 이는 선묘와 선묘샘 또는 용정샘으로 인해 그 맥이 오늘까지 이어져 왔다.

답사팀 일행은 서울에서 아침 7시에 출발, 부석사에 1시에 도착하여 불전에 삼배를 올리고 무량수전 뒷편에 있는 선묘각으로 향하였다. 용정샘물로 곡우절에 딴 차를 달여 선묘각에 모셔진 선묘영정에 차문화협회 이귀례 회장이 차를 올리고, 그 뒤를 따라 송종남·이건호 부회장과 필자가 차공양을 올렸다.

법당 지하에 매몰된 선묘정으로 인해 선묘가 다시 환생하는 듯했다. 아직도 법당 지하 선묘정 밑에는 선묘가 석룡으로 화해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부석사의 노보살 말에 따르면 “과거 선묘정과 식사용정이 있었는데 현재는 매몰되고, 아미타부처님의 좌상 밑에 선묘정이 묻혀 있다”며 “좌상 밑의 샘물은 부석사의 식수로 현재도 활용된다”고 했다. 이를 확인코저 법당 밑에 묻힌 파이프를 따라 선묘각 좌측을 한참 오르니 물탱크가 있었다. 물탱크를 열어 보니 물이 차고 맑고 깨끗했다. 이 물로 아미타부처님과 선묘여인에게 우리 답사팀 일행이 차를 헌다하니 그 차는 곧 감로수로 변하여 깨달음의 차가 되었다.

부석사가 선불교의 현장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부석사 주지인 근일 선사의 큰 원력에 의해서이다. 근일 선사는 잃어버린 부석사 주변의 토지를 새로 찾고 부석사의 선풍을 재현시킬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부석선차가 새롭게 꽃피는 것도 근일
선사가 일으키려는 선풍과 무관하지 않다.
용정샘물로 맛본 차맛은 분명 선묘차향의 세계였으며 한 잔의 차가 곧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자료 : (사) 한국차문화협회>http://www.koreatea.or.kr